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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관리인
관리인2026년 5월 31일3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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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었다. 최근 이 책이 다시 주목을 받아서인지 여러 출판사의 판본이 나와 있었다. 나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을 골랐다. 번역에 관한 나의 기호가 반영된 결정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인연 집착의 발로에 가깝다. 천병희 선생은 내가 대학 신입생이 되기 한 해 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번역 개정판을 내놓았다. 나는 천병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잊었다. 아마도 시험기간이었을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학교 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었다. 사실상 선생과 아무런 인연도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누군가의 인터뷰를 읽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인연이라고 우긴다. 내가 교양있는 가정에서 자란 여자들이 행하는 습관에 가까운 호의, 또는 에티켓을 연애감정으로 착각하듯이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아침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읽어서일까? 임산부석에 앉은 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안면몰수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껴서일까? 망신을 주는 상상을 하는 내게 철학자 황제는 말한다. 항상 선을 향하며 공동체를 생각하고 로고스(보편적 이성, 우주적 질서)를 따르라고.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가하더라도 그는 우주적 관점에서는 로고스를 따르고 있으므로 나는 그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나를 콕 집어 말한다. 비극배우나 창녀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타고난 비극배우이며 머릿속은 난잡함으로 가득하다.

천병희 선생의 일리아스를 읽었을 무렵은 힘든 시기였다. 지금은 내게 다가오는 문제들의 윤곽을 손으로 만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냥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언젠가 들어오리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문 틈으로 들어온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춤을 통해서 말이다. 지금은 상당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제 중년의 초입을 앞두고 있다. 그 때보다는 나아졌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버거운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내게 시간과 기회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난이도가 낮아진 대신 타임어택이 설정된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는 내가 노력하면 간신히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세상에 가지고 온 결핍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이름 붙이기를 애써 거부해왔던 것들 말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말을 받아들이면 일시적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기독교인들이 고난과 시험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처럼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결정론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윗동네를 비롯하여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이 모두 순리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그야말로 부조리하지 않은가? 반면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호의호식하다가 떠난다. 황제는 우리가 죽는 순간 로고스로 환원됐다가 다시금 다른 존재의 질료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잠시 육신을 얻어 정해진 여정을 수행하고 돌아가는 것 뿐이기 때문에 황제든 빈민이든 결국 모두 같은 존재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황제이기 때문에, 철학을 논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다른 이의 형평성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여유가 없다.